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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특전사들과 쓴 그림책

뭐든지 혼자 하는 것은 외롭고 꾸준히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항상 같이할 사람을 찾곤 하는데, 파병 기간에도 특별한 활동을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들은 UDT 특전사들이었다.
파병이 결정되고 출항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온몸에 근육을 갑옷처럼 입은 UDT들이 우리 배에 승선했다. 그들은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고강도의 훈련을 받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같은 남자로서 멋있다는 생각에 동경심이 들기도 하면서 쉽게 다가가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야식까지 배식을 마무리하고 식당에서 책을 읽으며 쉬고 있는데, 특전사 2명이 말을 걸어왔다. 식당에서 늘 책을 읽고, 때론 무언가를 쓰고 있는 나에게 궁금증을 가진 것이었다. 나도 예상치 못한 인사에 처음에는 어색하게 웃었지만, 곧 대화는 길어졌고 어느덧 4명으로 모인 우리는 거의 매일 밤 빈 식당에서 만나게 되었다.
낮에는 이성적인 업무가 많기 때문에 밤에 우리는 색다르게 그림을 그렸고, 책을 읽으며 이야기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 시간은 파병에서의 경험을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사색하는 시간이었다.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우리는 같은 경험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활동은 생각보다 꽤 다채로웠다.
한 번은 서로의 음악 성향을 통해 성격과 개성을 알 수 있었는데 그때 나는 클래식 음악같이 나의 머릿속과 정신성 그리고 내면으로 들어가는 음악들을 좋아했다면, 누군가는 입 밖으로 약간 내뱉은 혼잣말 같은 노래들을 공감하고 좋아했다. 아마 너무 어린 나이부터 힘들게 운동선수를 해서 그런 감정이 생긴 게 아닐까 싶었다.
노랫말과 함께 본인의 경험을 그려낸 그림 솜씨는 너무 생생해서 우리 모두 한순간 들리지 않는 음악을 들으며 읽어 내려갔다.
음악과 기억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서로가 지나간 이야기들을 깊게 주고받게 된다. 한 번은 같은 단어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서로 다른 게 인상적이어서 단어의 의미에 대해 다른 생각을 적어본 적이 있다. 일상적으로 자주 쓰던 단어를 낯설게 보면서 몰입해서 고민해보니 각자의 시선에서 비슷한 점과 다른 점들을 발견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관찰력

남들보다 더 많이 보고, 다르게 보고, 외형만이 아닌 그 속의 본질과 이유를 찾기 위해 길러야 하는 능력
무언가를 집중해서 꿰뚫어 보는 힘
세상을 풍요롭게 살아가기 위해 과정. 관찰해야 꽃잎의 개수를 헤아릴 수 있고, 빗소리의 리듬을 들을 수 있고, 잔디가 자라는 소리를 느낄 수 있다.

Why

인간만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사고방식. 역사는 '왜'라는 질문과 함께 변화하였다.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사물을 관찰하든지 그 속의 본질 속성을 파악하고 내가 장래에 하게 될 일에 의미를 부여하여 여러 시련이나 위기가 닥쳐도 무너지지 않는 기초 토대가 될 단어.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져봄으로써 아직 미완성인 나의 꿈에 살을 붙여 나가는 과정
내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 일을 하겠다는 마음가짐, 또는 신념. 그 마음가짐이나 신념이 그릇되지 않고 깨끗하고 목표가 높은 자만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다.

대화

성숙한 사람일수록 신중하게 하는 것.
나의 첫 '왜'의 고민이었던 '나는 왜 대학에 가고 싶은지', '왜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에 대해 해답을 찾아주는 과정
너와 내가 '통'할 수 있는 첫걸음

침묵

사색을 위한 가장 능동적인 언어. 침묵할 때 만이 자신과 주변에 대해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준비가 완료된다.
내가 이곳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것.
자주 쓰면 안 되지만 가끔은 필요한 것

예술

세상을 '거룩하게 보는 방법' 인간은 나비처럼 극적인, 기적 같은 변화는 없지만, 세상에 극적인 작품을 만들어 거룩함을 이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술.
'현실을 바꿀 수는 없으니 현실을 보는 눈을 바꿔라'라고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말하잖아? 그럼 난 현실을 예술로 보고 싶어
인간의 직관력을 언어로 말할 수 없으니 무엇으로든 표현한 것.
내가 평소에 만날 수 없던 사람들과 대화하고, 다른 시선을 나누고, 거기서 강렬한 통찰을 얻는 경험. 이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이자(물론 군대에서 간 것이지만 해외를 계속 방문하기에 이런 대화가 가능했던 것 같다) 매력인 것 같다. 특전사 들과 때로는 감동의 이야기를, 때로는 함께 방문한 눈부신 자연에서의 경험을, 때로는 인생의 진지한 고민을 이야기하고,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려보면서 우리의 추억은 마치 한 권의 그림책처럼 남게 되었다. 살면서 누군가와 함께 다시 이렇게 이야기하고 함께 기록하며 추억을 꾹꾹 담아내는 경험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 추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흐릿한 그림들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