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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 눈을 감고

지중해의 바다에서 다시 한번 조르바와 만나다.
몰타에 도착을 알리는 함내방송이 울려 퍼진다. 우리는 빨간 Kapok Jacket을 입고 입항 준비를 한다. 구체적인 입항 지시가 떨어지기 전까지 정해진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해서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이미 눈과 마음은 지중해의 섬 풍경을 바라보고는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몰타
보통 한국 사람들에게는 꽤 생소한 이름의 나라이다. 몰타는 지중해에서 이탈리아반도 끝 시칠리아섬보다도 아래에 있는 작은 섬나라인데, 크기가 제주도의 1/6이어서 한 장의 세계지도에서 몰타를 찾으려면 상당히 눈에 힘을 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작은 크기의 섬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몰타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은 무려 BC 4000년경으로까지 타임머신을 타게 된다. 지중해 한가운데에 위치했기 때문에 로마나 비잔틴 제국 등 여러 고대 지중해 문명이 지나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중에서 몰타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게 되는 모습은 성 요한 기사단의 흔적이다. 이들은 십자군 전쟁을 위해 창설된 기사단으로, 1530년 8 대국의 십자군 기사들이 몰타로 와 200년간 몰타에서 거주하면서 몰타기사단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일찍부터 여러 나라의 침입과 지배를 받아야 했던 몰타는 1565년에 침략을 받게 되는데 당시 막강한 진영인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성요한 기사단은 몰타를 지켜내는 업적을 거둔다. 당시 9천 명의 기사단이 4만의 오스만 군을 상대했다고 하니, 지금 남아있는 몰타를 볼 수 있다는 게 이들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막아낸 공으로 인해, 몰타의 소유권을 지닌 스페인 찰스 5세는 이 기사단에 몰타를 하사했고, 기사단 중심의 통치가 이루어졌다. 몰타 기사단은 1798년 나폴레옹의 통치 이후 몰타를 떠났고, 현재는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몰타의 수도인 발레타에 입항하여 교민들을 안전하게 모두 호송하고 나서 육지에 발을 붙일 수 있었다. 임무 완료 후 배에서 내린 우리는 발레타의 오래된 길들을 걷기 시작했다. 중세 몰타에 주둔했던 성 요한 기사단이 오스만과 싸움에서 승리한 후 몰타를 더 굳건히 지키기 위해 만들었던 성채 도시 발레타.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이곳은 1980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을 만큼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래서 길을 걸으며 마주하는 건물들이 대부분 중세 유럽풍이다. 석회암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려진 낡은 건물 하나하나에는 몰타의 역사적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새롭게 쌓아 올려지는 새로운 문명들은 기존의 얼굴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화장을 덧붙이는 수준이었는데, 그 점이 너무 놀라웠다. 새로운 것으로 그냥 갈아치우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해야 하지 않지만, 기존의 것에 어울리게 무언가를 덧붙여 나가며 유지한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치열한 고민과 주변 환경을 함께 보는 시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흔적과 함께 이곳 건물에 칠해진 새로운 화장들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고, 이 거리와 도시를 매혹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길을 걸으며 골목으로 들어갈수록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풍경이 이어지는데 500년의 시간을 건너온 건물들은 햇살을 받으며 은은한 표정을 자아내며 우리들의 발걸음을 인도했다.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건물들을 눈과 손으로 어루만지다 보면 볼록 튀어나와 있는 발코니가 지나가는 우리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자칫하면 너무 단조로울 수 있는 건물들의 미색에 매력적인 립스틱과 아이라인이 그려지듯 골목마다 다양한 색상으로 이루어진 발코니가 그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이는 아랍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아랍의 여성들은 종교적인 문화 때문에 밖으로의 외출이 쉽지 않아 창문을 통해 외부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발코니 문화가 발달했다고 한다. 외출이 쉽지 않은 그녀들은 이 발코니에서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바구니를 내려서 물건을 사기도 하고, 다른 아낙네들과 소통하기도 했다. 그래서 발코니는 또 하나의 세상을 향한 문이었다.
그녀들이 발코니에서 세상을 바라봤을 시점을 상상하다가 뒤를 돌아보면 푸른 지중해가 펼쳐진다. 정말 청아하고 파랗게 펼쳐진 지중해는 마치 하늘을 그대로 삼켜버린 것 같았다. 신선한 공기, 기분 좋을 정도의 따사로운 햇살, 유적들을 만지면서 느껴지는 촉감, 조용하게 들리는 도시의 목소리, 계속해서 마시고 싶은 공기의 맛까지 모든 오감은 자연스레 젖어들 수밖에 없었다. 길어진 항해로 고단했던 상태에서 지중해의 바다를 바라보니 한 층 더 들뜨기 시작했다. 표정은 밝아졌으며, 목소리는 커졌고,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지중해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 단테의 '신곡'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의 무대였다. 강렬한 햇빛만큼이나 찬란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니 그동안 읽었던 책들과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하나씩 그려졌다. 가만히 한 곳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유적이 있는 섬이 보였는데 그 모습을 보자니 왜 이 바다에서 신화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지 자연스레 이해되는 것 같았다. 호메로스는 지중해의 석양을 보고 붉은 포도주가 출렁이는 바다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푸른 아름다움,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예술과 신화적 영감의 원천들... 그 자체로 역사이며 예술이기에 그 모습을 보고 어찌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설레는 마음과 발걸음으로 오래된 골목들을 따라 쭉 올라가면 어퍼 바라카 가든(Upper Barrakka Garden)에 도달한다.
편안하게 숨을 내쉬며 바라보는 반대편으로 세인트 안젤로 요새(Fort St. Angelo)가 보인다.
이곳은 1661년 이탈리아 기사단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만들어진 정원인데, 나무가 많이 심겨 있고 1년 내내 꽃이 지지 않게 잘 가꾸어진 정원이라 몰타 사람들이 휴식처로 즐겨 찾는다. 이곳에선 지중해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어 자연스레 호흡에 집중하게 되고 몸과 마음은 편안해져 간다.
이 성은 몰타 기사단 최초의 본부 역할을 했던 곳이었고, 지금도 상층부에는 한 명의 기사가 살면서 일부를 지키고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단단해 보이는 성벽은 과거의 수많은 침략을 받아온 몰타의 치열한 역사가 새겨져 있지만, 다행히 지금은 평화로운 모습으로 쉬고 있다.
지중해 바다를 끼고 긴 세월이 담긴 그림 위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풍경과 사람들을 바라보니, 입대 전 생각들이 떠오른다. 매일매일을 치열하고 만족스럽게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던 일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스스로 갈수록 높은 기준으로 채찍질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때로는 새벽부터 일어나 꽉 찬 하루를 보내고 나면 왠지 텅 빈 허전함이 느껴지는 때도 더러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오늘 하루가 과거에 대한 후회를 극복하기 위한 콤플렉스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갈망을 위한 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들이 영원한 것이 될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의지는 입대 후에도 이어져, 이곳에서의 매 순간순간들을 후회 없는 시간으로 만들고자 놓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곳 몰타에서 마주한 오랜 역사의 흔적과 바다 앞에서는 내가 사는 짧은 순간들이 작은 파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파도의 포말이 부딪힘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지며 내 얼굴에 닿았을 때 나는 다시 조르바를 떠올렸다.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 하는 건가요?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닙니까?매사를 정밀하게 달아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친구 결정해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은 묻지도 않지요.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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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묘사한 조르바의 모습은 너무 생생해서 떠올릴 때마다 마치 조르바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조르바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지중해 바다 한가운데인 이곳에 있으니, 옆에 꽃핀 나무가 보이고, 날아가는 새의 지저귐이 들리고, 누군가 가꾸어 놓은 정원의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한국에서 나를 둘러싸던 수많은 조건과 상황들은 지금 이 순간에는 무효가 되었다. 그래서 조르바는 나를,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나를 세워줬다. 그는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이상도 모두 벗어던지고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현재의 '나'를 바라보게 만든다.
마음은 바다처럼 광활하게 열려 있고, 가슴은 배짱으로 가득 찬 조르바!
그가 나에게 다가올 때면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큰 용기를 얻어가게 되는 것 같다. 이곳에서의 경험이 앞으로의 나의 삶에서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순간마다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조르바는 말을 걸 것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지중해의 푸른 바다처럼 너무나 찬란하다.